친구가 구보에게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마지막이다. '별일' 없고 별 '볼일' 없는 구보가 행복을 찾으러 경성의 곳곳을 둘러보는 이야기치고 마무리가 뜬금 없었다고, 예전엔 생각했다.
1. 어제 어머니께서 올라오셨다. 수육과 삼계탕을 챙겨 놓으시고 능숙한 손속으로 하나 둘씩 음식을 풀어 놓으신다. 수육 속에 깃든, 삼계탕의 육수 속에 깃든 맛에서 어머니께서 음식을 다듬는 모습을 본다. 집에 적막하게 울려 퍼지던 도마 위의 칼질 소리가 요새 듣고 싶어했던 소리였다. 가만히 심상을 떠올려 본다.
2. 어머니께서 티비를 켠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근래 챙겨 보시는 모양인데, 육아 프로그램에는 별다른 애착이 없던 난 처음으로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엄만 특히 '민국'이를 좋아하신다. 민국이가 하는 행동들과 말을 보며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도 덩달아 웃는다. 맞다. 민국이라는 아이를 보니 참 귀엽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온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모든 사물에 반응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저렇게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3. 근래 정효구가 쓴 '한용운 시 전편 다시 읽기'란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다. 한용운의 시는 쉽지만 역설적인 논리와 발상으로 인해 일면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시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한용운의 시를 감상할 때 '근대적' 의미와 이론의 틀로 그 시편들을 바라보면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님의 침묵'의 서문격에 해당하는 '군말'이라는 첨언을 읽을 적에 '님'이 누군가를 떠올리는 데에 급급하지 말고, '님'과 '나'의 관계와 '님'은 어떻게 하여 관계 맺을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긔운'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다볼 때 '님'이 생겨나며 그 '님'과 '나'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예전에 '군말'을 읽었을 적에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라는 구절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왜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일까. 작가의 주장은 (혹은 한용운의 의도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 게 실상은 '님과 나'의 사랑이 아닌 자신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용운은 그런 '너희들'을 '(집을)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으로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런 부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한용운이란 사람은 행복했을까 하고 고민해보았다. 사랑의 대상에 한계가 없고 대상도 없고, 만물이 님인 그런 경지 속에서 살았을까.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친구가 구보에게 경성의 어둑한 길거리에서 말한다.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고. 이제 친구의 마음결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