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어리숙하고, 어설프던 스무살의 나를 기억한다. 대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고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 공교롭게도 환영회가 열리던 강의실이 아닌 다른 강의실로 오라는 문자를 받게 된다. 잘못된 통보로 인해 아무도 없던 텅빈 강의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시간 속에 어떤 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해사해 보이는 외모, 낮고 곱게 깔리는 목소리로 반갑다고 인사를 하던 사람. 다른 강의실에선 이미 신입생 환영회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먼저 만나게 된 우린 교정을 거닐게 된다. 음악 이야기를 했고, 생각보다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이야기가 놀랐다.

 아직도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온몸으로 증명하던 차가운 공기와 입김. 낯선 사람과 공간에 대한 막연한 설렘과 두려움. 그 속에서 우린 만났고 이내 곧 친해졌다. 서로를 이해하면서 기꺼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라 생각했다. 어디든 다녔다. 그의 고향 의정부는 물론이고 내 고향 대전. 서울 구경 온 촌놈처럼 홍대, 신촌, 이대, 코엑스, 명동, 남산, 구로디지털단지.. 돈이 넉넉지 않던 시기였어도 사람과 풍경을 관찰하고 구경하며 의미 없는 말들을 서슴지 않게 나눴다.

 서울 생활은 지독하게 외롭고도 힘겨웠다. 그때부터 아직도 서울은 나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그저 외롭고 쓸쓸해지고 싶어했던 십대 시절의 고독함과 달리, 숙명처럼 사정없이 날 헤집어 놓았던 근원적 고독감은 정말이지 버텨나가기 힘들었다. 그 좋아하던 음악도, 책도 귀와 눈에 들어올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 그런 날 잡아 이끌어준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당위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벽면에 수없이 꽂힌 책들을 한 권씩 차분하게 꺼내며 표시해둔 구절을 읽어보라던 내밀었다. 시집과 기사 스크랩, 헌책방에서 구한 옛날 책들. 어떤 시집 구절을 읽어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조용히 눈물을 흘린 그날 저녁도 생각난다. 산발이 된 머리를 해 볼품없던 그 모습으로 파자마를 입은 채 남의 집 방구석에서 시집을 들고 울던 그날밤. 그 사람은 어찌 생각했을까. 나를.

 수업을 듣다 출석만 부르곤 빠져나와 교정에 하릴 없이 앉아 이어폰 한쪽을 나눠끼던 봄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여인들은 봄날보다 아름다웠고, 우린 그 여인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또 어느 날은 동아리방에서 통기타를 가져나와 점심 때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기타를 연주했다. 되도 않는 노래를 가끔 흥얼거리곤 했다. 그러다 정기 공연에 함께 무대에 선다. 떨린다며 공연 직전에 편의점에 들리자고 한다. 소주를 산다. 레몬소주다. 상큼한듯 하다 역한 알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이 액체가 우리의 성공적인 공연을 보장해주는 묘약인양 삼켜버린다. 공연이 끝났다. 그렇게 1학기도 끝난다.

 천성이 못된 탓에 이형을 힘들게 한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나에게 싫은 내색을 크게 한 기억도 없다. 여러모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군 복무 시절 써줬던 편지들도 기억한다. 그리고 휴가 나왔을 때에 데려가줬던 횟집도 기억한다. 사진을 배우고 있다며 짧은 까까머리의 나에게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그 모습도 기억한다. 그리고 객쩍게 웃으며 '너무 말라 보이게 나온다'며 피사체가 되길 거부했던 나의 모습도 기억한다.

 이형은 나에게 이십대의 전부였다. 이형과의 추억이 곧 내 이십대 시절의 추억이었으니까. 평소 나서기 싫어하고 사귐에 어색한 나와 이형이 친하게 지낸 이유도 가끔씩 궁금하다. 사람 사이의 일들은 짐작하기 어려운 일 투성이니까.

 축사를 낭독했다. 축시라고 해야 맞을까. 축사도, 그렇다고 축시도 아닌 어쩡정한 글귀들을 써가 낭독했던 오늘 일이 멀고도 먼 일 같기만하다. 이형과 잘 어울리는 신부가 옆에 서있었다. 형은 언제나 그렇게 웃던 미소로 방긋 웃는다. 신부도 미소짓는다. 진심으로 행복해보였고 앞으로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낭독을 마치고 자리에 들어와 이형이 읽었던 사랑의 서약서를 곱씹어 본다. 그저 이형과도 같이 담백한 문장들로 쓴 사랑의 맹서였고, 언약이었다. 가식과 허위는 없었다. 동아리를 함께 하던 시절에 배웠던 창작곡을 축가로 부른다. 떨려보이는 모습이지만 보는 사람은 즐겁다. 소박했던 결혼식이지만 진실했다. 진실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삶의 어느 한 막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커튼이 내려지고 난 또다시 홀로 남았다. 그전처럼 느꼈던 폭군같던 고독감이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고독감이 슬며시 다가왔다. 저만치 손 흔들며 웃음짓는 스무살적 내 모습이 언뜻 비친다. 잘 있으라고, 잘 살라고. 너의 삼십대도 언제나 그렇듯 좋은 사람과 함께 할 것이라고. 그때까지만 조금 참아볼 수 있겠냐고 말한 뒤 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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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od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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