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부터 현재까지 읽었던 책과 책에 대한 단상들


1. 관촌수필 - 이문구

* 소설과 별로 친하게 지내오지 않았지만, 소설가라면 관촌수필을 읽고 누구나가 좌절감을 한 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한국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글들이며 작가의 아름다운 마음결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이 책으로 인해서 삶의 방향을 많이 수정했다. '시적 인간'이 되기보다 '소설적 인간'이 되기로. 그게 무슨 차이일까.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마음 속에서 약간이나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내밀하게 해보고 있는 요즘이다. 택도 없겠지만!

2.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역

* 소위 해외 걸작선이라는 작품들의 한계는 번역의 문제와 크게 결부되어 있지 않을까. 안그래도 읽기 힘든 만연체의 문장들 속에서 제 3부의 마지막 부분들에는 크고 작은 오역과 오타들이 눈에 띄어 거슬린다. 소설의 내용은 글쎄, 어찌 되었든 이런 식으로 마지막에 구원 받는다는 구성은 그닥 즐겁지 않다.

3. 김수영을 위하여 - 강신주

* 김수영에 대한 애정이 담긴 안내서 작가 안내서 정도로 보면 될 듯. 사실 이 책을 볼까 하다가, 전공자들이 쓴 김수영에 대한 저서를 읽어보고 싶어 찾아보았는데, 결국 찾기 힘들었다. 물론 논문의 형식으로 나온 글들은 많겠지만, 김수영에 대한 연구나 작가로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의외로 저서들이 많은 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읽을 만한 책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 애정으로서의 김수영에 대한 견해를 보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전기적 연구라든지 시 자체에 대한 독해의 연구 등 정갈한 이론의 결과물로 보려면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나 싶다. 물론 그게 강신주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무어랄까, 편의점에서 파는 '웰빙 식품'이랄까.

4.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안광복

* 고등학교 시절에 읽어보면 좋았을 서적. 책 자체도 금방 읽는다. 현재로서는 읽을 필욘 없다.

5. 조선의 음담패설 - 정병설

* 정병설이라는 저자는 고전 문학 쪽으로 긍정적인 성과물을 많이 낸 연구가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음담패설'을 주제로 한 책은 없었기에 궁금해서 집어들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남긴 야담집이나, 민담 등에서 추출한 소위 '야설'들이 실려있긴 하고 희독의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유발된 흥미를 채워주기에는, 그리고 작가의 이름에 비한다면 앞에 실려있는 음담패설들과 그에 대한 해설들은 그닥 풍부하진 않다. 물론 당대의 풍속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있다만. 오히려 뒷부분에 부록처럼 실린 세책들의 낙서들이 더 재밌게 읽힌다.

6. 백석의 맛 - 소래섭

* 비국문학자 출신이지만 석박사를 국문학으로 옮겨 수학한 저자라 그런지 백석을 바라보는 연구 독법이 인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맛'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굳이 외국의 '미감이론'들을 끌고와 백석의 시와 결부시키는게 좋은 선택이었나 의문이긴 하다. 이런 접근도 의미 없진 않다만, 아무래도 이론과 백석의 '맛'의 접지 상태는 소위 '찰지지'못하다는 게 내 인상이다.

7. 야성의 사랑학 - 목수정

* 의심할 것도 없는 쓰레기에 가깝다.

8. 엄마 수업 - 법륜

* 자녀 양육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하게 되는 책이다. 기실 자녀 문제의 대부분은 부모가 자녀를 바라볼 때 인격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몰개성한 자신의 또다른 의지라 생각해서 발생하지 않던가. 당연한 이야기들이지만 법륜의 주장은 자녀에게 '손을 떼라'이다. 물론 조건은 언제까지는 돌보아주고, 언제부터는 보내주라는 이야기지만.

9. 금강경 강의 - 법륜

* 쉽게 읽히지만 쉬운 내용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실천의 문제이다. 앞으로도 가끔씩 열어보며 보고 싶다.

10. 인간 붓다 - 법륜

* 인도의 낯선 지명들과 인명들이 독해를 떨어뜨린다. 난 이런 독서에는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인간 붓다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려 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는 없다.

11. 파우스트 - 괴테, 이인웅 역

* 독서를 끝내고 문득 든 생각은 '이명박이 파우스트를 좋아할 것이다'였다. 궁금해서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유인촌과 함께 파우스트 공연을 관람한 기록이 검색된다. 어찌되었든 난 최후에 신의 손길에 의해 구원 받는 이 이야기 구조가 정말 싫다. 

12.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 위화

* 공지영은 '자신은 위화의 열렬한 팬'이라고 이야기한다. 위화의 저서를 처음 접해본 입장에선 아직까지 팬으로 자처하기에는 어려울 듯하나, 당대 중국의 풍속도를 간명한 단어들로 풀어써낸 작가의 통찰력과 관찰력, 그리고 세심한 기억력에 감탄할 만하다. 후에 '허삼관 매혈기'를 읽어볼 생각이다.

13. 서울은 깊다 - 전우용

* 가장 즐거웠던 독서이다. 어느 분야나 '좋은 학자'가 있길 마련이고, 그리고 이런 좋은 학자가 써낸 '좋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되기 싫더라도 그 앞에서 '좋은 독자'가 된다. 훗날 다시 읽을 생각이다.

14. 당신들의 천국 - 이청준

*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제 3부에서 '사랑과 믿음'이라는 소설의 주제는 내가 납득하지 어려운 측면들이 많다. 마치 '사랑과 믿음'은 천상의 신을 생각하게 때문이다. 뒤에 있는 김현의 비평문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비평문이다.

15. 백석을 만나다 - 이숭원

* 앞서 이야기한 '좋은 작가의 좋은 책'이다. 평생 백석을 연구한 연구자로서, 자신의 연구 업적의 성과를 이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해놓았다. 학자의 건강한 자부심이 밉지 않다.

16. 126편 정지용시 다시 읽기 - 권영민

* 정지용에 대한 개인적 애착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동안 정지용 시 해독을 어렵게 하는 요소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저 즐겁게 읽기만 하면 된다. 따라가다 보면 정지용이란 시인이 보인다. 그렇지만 후반부에는 작가의 힘이 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닌가? 원래 이런 형식의 책이 지닌 특성일까. 원문-한글-현대어 번역으로 되어있지만, 이 구성이 그다지 좋지 못한 느낌이 든다. 기실 한글 번역과 현대어 번역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현대어 번역을 말그대로 '번역'차원에서 써버렸을 어떨까.

17.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 과학 책을 읽기 싫어해서 참 질질 끌었지만, 초반부의 어려운 독해를 마무리하면 후반부의 작가의 주장들에 대해 경탄을 하게 될만하다. 독서 기간이 좀 길어서 흐름을 쉽게 따라가지 못하고 억지로 밀고나간 부분이 있어서 독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초벌 독해를 끝냈으니 훗날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정말 참신한 사고 방식이다. 특히 생물학과 문화인류학-윤리학(구체적 언급은 없었지만)이 만나는 지점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죄수의 딜레마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18. 참말로 좋은 날 - 성석제

* 정말 즐겁게 읽었다. 소설의 암울함과 우울함이 저 뒤편으로 잠시 미뤄두면, 일상의 자리에 일상의 지위를 부여해주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을 내두를 수밖에 없다. 상황이나 배경 묘사가 과하다 싶다가도, 그게 결국 우리의 일상이지 않았나를 생각해보면 작가의 선택과 묘사가 적정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일상의 살얼음판으로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며 걸어나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묘사한다.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겠지. 수업 시간에 함께 읽어보고 싶은 단편이 하나 있다.

19. 발자크 평전 - 츠바이크

* 소설가 발자크의 생애를 청신한 언어감각으로 풀어낸 츠바이크의 문장력에 감탄하며 순식간에 700쪽의 분량을 읽어내려갔다. 발자크의 삶 자체로 큰 재미를 주기에도 충분한데, 츠바이크의 문장에 담겨있는 유머감각이 독해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책을 구할 수 없어서 도서관에서 제본을 떠서 구매했다. 제본을 한 노력과 대가가 헛되지 않았음이 뿌듯하다. 차후 츠바이크가 쓴 니체의 전기를 읽어볼 요량이다.

20. 나의 서양 미술 순례 - 서경식

* 누군가에겐 좋은 책이었겠지만, 미술과 그닥 친하지 않고 여행과는 더욱 친하지 않기에 지루하게 책을 넘길 뿐이었다.


현재 보르헤스의 '알렙'과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를 읽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이 책들은 읽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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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od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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