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만남 자체가 그리 중하지 않아 가벼운 신변잡기만 늘어놓다가 헤어질 요량이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내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 놓고 싶지 않았기에 잠자코 귀 기울이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쪽에서는 내가 이야기를 더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여러 일화들을 더 듣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학교 안에서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조직의 시스템이 별로라고 생각한다는 하소연만 늘어 놓게 되었는데, 이는 순전히 내 못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ㅊ 역시도 직장인이었고, 사회인이었다. 나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먹는 사람이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대화를 주고 받다 ㅊ가 '3-6-9' 이론을 들려주었다. 어느 조직에서건 '3개월, 6개월, 9개월'이 고비이고, 그 시기가 지나면 '3년, 6년, 9년'이 고비라는 이론이었다. 한편으론 하소연이 좀 과했나 하는 생각에 미안했지만, 그래도 그 이론이 꽤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 난 6개월 째에 접어들고 있으니 고개를 하나 더 넘어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였다.
ㅂ부장의 언사로 인해 지난 금요일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얼마간의 농의 섞여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말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바람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한 내 모습이 더 싫어 얼마간 자괴했다. 물론 집에 와서 기타 몇 번 치니까 기분은 원래 상태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날 지하철 안에서 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먹고 사는, 먹고 싸는, 원초적인 생활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영역을 담보 잡힌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말도 안되는 소설의 줄거리를 스스로 써봤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벌며 아무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던 A. 하루하루 자신의 삶과 미래에게 대해 수없이 많은 회의감을 던져 놓는다. 집으로 향하던 마을 버스 안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4명의 이름모를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반대편 운전자의 실수로 마을버스는 받치게 되고, 운전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승객 4명은 중태에 놓인다. 기적적으로 A는 살아났고, 그 옆에 타고 있던 B라는 사람 역시도 극적으로 살아난다.
A는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여 놓았다 다시금 살아난 자신의 인생에 끝없는 찬사를 보내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비루하고 지리멸렬했던 삶이 다시금 빛나게 된 일을 떠올려보고, '죽음'이 있었기에 다시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B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윽고 A와 B는 일상에 함몰돼 그저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체험을 제공해주어 다시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일의 이름이나 저 2인조의 이름은 짓지 못했지만)
A와 B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체험 후 일어났던 기적적인 삶의 변화. 간증은 곳곳에서 들려왔으며 철저히 음성적이었던 이 사업은 그럴듯한 조직 체계까지 갖추게 되었다. 심지어 경찰과 법관들도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이 죽음 체험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A, B는 이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 스스로 자살하고 만다. 이유는 그 사업 역시 자신들의 일상이 되어버렸고, 그 속에서 더 이상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소 재미도 없고, 교훈도 없는 이야기지만 문득 이 소설 속의 사람들처럼 대다수가 늙어가고 죽어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삶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취미마저 빼앗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연애와 가정까지도 위협당하며 나이를 먹어간다.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과연 나는 혹은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답은 없지만 여기 시 하나는 있다. 근래 읽었던 시 중 가장 마음을 달래주었던 한 편이었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일기>, 안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