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례

일상과의 화해 2016. 2. 29. 14:58

 어제 욱태와 공연을 보러 갔다. 옆집 사람과 몇 번 왕래가 있고 난 후, 그 사람이 첼로 연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돌이켜 보면 버릇 없이 들릴) '초대권 있으면 주세요.'라고 내뱉어 버렸는데, 그게 결국 어제의 공연 관림길에 오르게 된 경유이다. 

 음악에 대해 자세히 논할 지평이 되지 못하는 고로, 짧은 평 남기자면 훌륭한 연주는 언제든 감동을 남긴다는 점.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한 박자와 화음 안에 어우러지는 것이 큰 울림을 준다는 점도.

 쨌든 지휘자라는 사람은 자신의 지휘가 다 끝나고 나서 몇 안되는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곤 무대 뒤로 들어간다. 그리고 박수는 끝나지 않고 못 이기는 척 다시 지휘자가 나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추켜세운다. 그래도 박수는 이어진다. 지휘자는 다시 들어가다, 다시 나온다.

 욱태에게 이것이 공연 매너이자 관례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쓸데 없는 겉치레라 생각하고 넘겼을 텐데, 청중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차라리 이런 관례가 없으면 더 허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관객이 많은 연주회에는 (높은 확률로) 훌륭한 연주자와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일 테고, 그때의 관례는 '멋진 음악을 들려줘 그냥 보내기 아쉽소' 정도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어제처럼 관객이 별로 없던 연주회에서의 관례란 '당신들의 음악을 알아주고 응원하오'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해봤다. 알면서 서로 짜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런 모습이 애틋해 보이는 순간이다.

 오늘 오디오 수리를 위해 남산 쪽에 들렸다. 오디오를 맡기고 돌아오던 길에 눈발이 휘날리고 따끔한 바람이 귓가에 날렸다. 그 길로 부모님께 돈을 부치고자 외대역을 내리고 길을 걸을 때, 그 관례 같은 것이 다시금 생각이 났다. 날이 풀리기 전, 즉 봄이 오기 전엔 언제나 그렇듯 한 번 더 매서운 추위가 온다는 사실이. 그것이 계절의, 하늘의 순행에 대한 관례가 아닐까 했다. 그리고 계절의 관례 속에 이때 즈음에 느끼는 마음도 언제나 그렇듯 착잡하고 복잡한 성질이다. 대학생 때에는 새학기라는 부담감이, 사회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새학기를 견뎌야 하고 버텨야 할 일이 눈 앞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고 잠시 춥다고 느꼈다.

 형로형과 11년 전에 외대 거리를 걷던 중 춥다고 한마디를 내뱉자, '인생 원래 추워'라고 3어절로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인생이 춥다던 그 친구는 더 바랄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얘기를 주워 들은 사람은 아직도 생은 춥다고 느끼고 있다. 미운 사람들, 미운 나들, 형편없는 주위들. 이런 것들만이 내 마음을 끈적하게 부둥켜 안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게 마치, 그 마음들이 나를 만들어 내는 어떤 관례들인양. 이제 그렇게 생각에 이르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향해 고개를 돌려 감상에 빠지는 사람들을 욕하던 난 결국 외대에서 과거 옛모습만 찾고 있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욕하고 싶지 않다. 감상이 아니라, 연민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은 과거의 나란 사람뿐이다. 

 지금은 허물어진 고시원 속에서 시체처럼 놓여 잠에 들던 나, 바퀴벌레가 수시로 튀어 나오고 옆방에서 정사하던 소리가 그대로 들리던 방 속의 나, 생활비 없어서 기타를 팔던 나, 드라이 아이스 공장에서 멸시 받던 나, 김ㄱㅇ, 김ㅈㅇ, 김ㅈㅁ에게 내 마음을 드러냈다 가차 없이 거절 받던 나, 배ㅂㄱ에게 여자 좀 소개시켜 달라하자 '형은 나이가 많아서 안된다'를 듣고 기분 좆같았던 나, 티스토리 블로그로 날 멸시하던 이ㅇㅈ, '것'의 쓰임새를 저지 당하기 위해 이ㅇㅈ에게 사용당한 나, 하숙집에서 옆방 서ㅈㅎ의 소음 때문에 견디다 못해 싸우고 결국 먼저 미안하다고 집을 나온 나, 공사장 근처의 소음에 어떻게 대응해보지도 못하고 집 밖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던 나.

 그 수많은 나들이 결국 나의 관례를 만들어 냈겠지,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추운 날이 되면 나를 연민하는 일이 하나의 관례가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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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od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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